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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relli Calendar

2017. 11. 29
Writer 신동헌 : 칼럼니스트이자 방송인. 자동차 전문 블로거 ‘까남’으로 잘 알려져

Writer 신동헌 : 칼럼니스트이자 방송인. 자동차 전문 블로거 ‘까남’으로 잘 알려져 있다.

타이어 회사 피렐리는 매년
최고의 예술가들과 함께 세계 최고의 예술 달력을 만든다.

피렐리캘린더 내지 Duckie Thot as Alice
피렐리캘린더 내지 Rupaul as The Queen of Hearts

몇 년 전, <플레이보이>지가 더 이상 누드 사진을 싣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는 종이에 여체를 인쇄하는 시대가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아름다운 몸매를 드러내고 싶다면 인스타그램 계정 하나 만드는 것만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시대가 됐으니까. 스스로의 판단과 연출로 잡지 발행 부수보다 훨씬 많은 팔로어를 거느리는 것도 가능하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셀러브리티가 된 사람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 수도 있으니 굳이 매체를 통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매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서 훌륭한 ‘셀카’ 실력까지 갖추고 있는 건 아니다. 요즘 카메라 장비나 보정 프로그램이 워낙 좋아지기는 했지만, 사진가의 빛 다루는 실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사진 콘셉트를 정하고, 결과물을 고르는 것은 또 포토그래퍼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작업은 편집자의 일이다. 정해진 콘셉트를 실제로 구현해내기 위해서는 의상을 고르는 스타일리스트가 필요하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만질 아티스트도 필요하며, 세트를 짓거나 장소를 물색할 사람도 있어야 한다. 고등학교까지는 투수와 타자를 모두 잘해내는 선수가 있지만, 프로가 되면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도 단순히 룰이 그렇게 정해져 있어서는 아니다. 한 우물 파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피렐리캘린더 내지
피렐리캘린더 내지

인터넷 보급이 인쇄 매체의 몰락을 가져올 거라고 많은 이들이 예상했지만, 핵폭발처럼 한순간에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다. 수준 미달의 콘텐츠들이 정리되기 시작했지만 기존 인쇄 매체들에는 채찍질하는 효과가 있어서 또 다른 도전이나 시도를 하도록 만드는 호순환이 생겨나기도 했다. 게다가 절대 서점에서 인쇄 매체를 사지는 않을 사람들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손쉽게 콘텐츠를 접하면서 좀 더 심도 있는 정보를 원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우리나라 역시 대형 서점뿐 아니라 편집매장 가운데 예술 사진집을 판매하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10여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외국에 나갈 때마다 사진작가의 사진집(양장본이라 엄청나게 무겁다)을 사오느라 수하물 무게를 초과하기 일쑤였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요즘 세상이 오히려 반갑다. 청담동 10꼬르소꼬모에서 노부요시 아라키가 일본 사창가에서 거주하며 찍은 사진집을 어떤 젊은 여성이 보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는 감격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이제 우리나라도 옷을 벗었다고 해서 무조건 외설 딱지를 붙이고 성을 상품화한다고 여기는 시대는 지난 것이다.

피렐리캘린더 내지
피렐리캘린더 내지

물론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칠한다고 모두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몸매 좋은 여자가 옷을 벗은 사진이라고 모두 예술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사진을 봤을 때 느낀 흥분이 감동을 동반하느냐를 외설이냐 아니냐의 잣대로 삼고 있다. 여체의 곡선은 잘 표현해내는 것만으로 예술이 되지만, 훌륭한 예술가들의 안목을 거치면 뇌의 흥분을 담당하는 영역보다는 종교 행사에 임했을 때와 같은 영역을 자극한다.

타이어 회사 피렐리는 그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프로페셔널이다. 피렐리가 만드는 P제로 롯소 타이어는 고무와 철사로 만들어진 물건인 주제에 물리적 한계를 넘나들며 그것을 끼운 차가 춤추도록 만든다. 노면을 움켜쥐었다 풀었다 미끄러지기를 반복하면서 조종하는 이를 황홀경에 빠지도록 만든다.

피렐리캘린더 내지
피렐리캘린더 커버

그들에게는 타이어 만드는 것 외에 또 한 가지 특기가 있는데, 바로 1년에 한 번씩 최고의 예술가들과 함께 세계 최고의 예술 달력을 만드는 것이다. 1963년 피렐리 영국 지사가 단골손님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처음 만든 한정판 누드 달력이 그 시작인데, 정비공이 일하는 타이어 가게 벽에 붙이는 용도가 아니라 VIP 고객의 차고나 서재에 걸도록 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시작부터 도색 잡지와는 좀 달랐다. ‘홍보용’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예술 정신’을 또 다른 형태로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라이벌 회사인 미쉐린이 타이어 소모를 늘리기 위해 <미쉐린 가이드>를 만들어 여기저기 다니도록 직접적으로 유도하는 것과는 접근 방법이 약간 다르다. ‘예술’이라는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프랑스 사람들이지만, 이탈리아인들에 비하면 역시 한 수 아래라고나 할까.

피렐리캘린더 이미지 (왼쪽) The Royal Duchess and Princess of Hearts - Whoopi Goldberg and Thando Hopa
(오른쪽) Queen and King of Hearts - RuPaul and Dji,on Hounsou
피렐리캘린더 이미지 (왼쪽) The Beheader - Naomi Campbell and Sean Diddy Combs
(오른쪽) Alice - Duckie Thot

당대 최고의 포토그래퍼와 최고의 모델이 동원되어 만드는 피렐리 캘린더는 리처드 애버던, 피터 린드버그, 애니 레보비츠, 마리오 테스티노, 브루스 웨버, 테리 리처드슨, 헬무트 뉴턴, 칼 라거펠트 등 거장들이 작업을 해왔다. 때문에 이 캘린더에 등장한 적이 없다면 트리플 A급 슈퍼모델 리스트에 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 포토그래퍼의 성향에 따라 노출이 심할 때도 있지만,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게 도색 잡지가 아니라 인류사에 남을 예술의 영역이라는 건 이미 검증됐으니까. 지젤 번천, 신디 크로포드, 케이트 모스, 하이디 클룸, 아드리아나 리마 등 슈퍼모델뿐 아니라 우마 서먼, 니콜 키드먼, 밀라 요보비치, 패넬로페 크루즈 등의 여배우들도 등장하곤 하는데, 1934년생인 소피아 로렌은 2007년에 만 73세의 나이로 이 달력을 위해 누드 사진을 찍었다.

피렐리캘린더 내지

팀 워커가 찍은 올해의 피렐리 캘린더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주제로 삼았다. 거기까지는 평범한 주제 같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지금까지의 피렐리 캘린더와는 다른 아주 참신한 시도가 많았는데, 우선 이번에 등장하는 모든 모델들은 흑인이다. ‘하얀 토끼’ 역할조차 검은 토끼가 맡았다. 그러나 팀 워커의 말을 빌리자면 “흑인뿐이라고는 해도 모든 인종을 망라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채로운 색상을 볼 수 있다”. 인종차별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건드리는 듯 건드리지 않는 듯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Thando Hopa as The Princess of Hearts Thando Hopa as The Princess of Hearts
Jaha Dukureh as Wonderland Princess Jaha Dukureh as Wonderland Princess
Whoopi Goldberg as The Royal Duchess Whoopi Goldberg as The Royal Duchess

다크 초콜릿 색상의 피부인 호주 출신 모델 더키 토트(Duckie Thot)가 앨리스를 맡았고, 알비노 모델로 유명한 산도 호파(Thando Hopa)는 하트 공주 역을 맡았다. 드래그 퀸인 루 폴이 하트의 여왕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북아프리카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할례 피해자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인 야하 두쿠레도 모델로 등장한다. 기존의 피렐리 캘린더 모델들과는 한 획을 긋는 캐스팅임을 알 수 있는데, 압권은 공작부인 역을 맡은 우피 골드버그다. 그녀는 “아무도 내가 피렐리 캘린더에 등장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등장하고 말았다” 고 말했다.

피렐리캘린더 내지
피렐리캘린더 내지
피렐리캘린더 내지

그러나 수많은 새로운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피렐리 캘린더다. 창의성이 넘치고, 에로틱하며, 미술 작품 대신 걸어두어도 손색이 없는 예술 작품이다. 비매품이기 때문에 누구나 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조만간 서점에 사진집으로 등장할 테니 그때를 기다려도 좋을 것이다. 뉴스건 영화건 만화건 음반이건 등장과 동시에 온라인 세상에 뿌려지는 시대이건만, 피렐리는 아직도 캘린더를 비매품으로 여기면서 온라인상에도 공개하지 않는다. 여기 공개하는 몇 장의 사진만 허용되었을 뿐이다.

피렐리캘린더 내지

음반 비닐 포장을 뜯을 때의 두근거림, 사진집을 커버에서 꺼내어 구겨질세라 조심조심 펼칠 때의 마음가짐을 잊지 말라는 뜻일 거다. 피렐리 CEO 마르코 트론케티 프로베라의 말대로 포토그래퍼 팀 워커는 ‘마법과도 같은’ 예술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작품이 더 궁금해지거나, 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다시 한번 읽어볼 마음이 들었다면, 이 캘린더는 예술 작품으로서 충분히 ‘열일’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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