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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슬라로 훌쩍

2017. 07. 12

별것 아닌 일로 아내와 티격태격한 어느 늦은 밤, 부츠를 꺼내 신고 헬멧 들고 집을 나선다. 주중에는 회사 일로, 주말에는 가족과 보내느라 지하 주차장에 몇 달째 서 있기만 한 모터사이클에 시동을 걸어주기 딱 좋은 기회다. 훌쩍 동해라도 찍고 와야지. 혼자 해 뜨는 해안 도로에서 유유자적 드라이브도 하고, 물회도 먹고 느긋하게 즐기다 와야지. 위기는 기회다. 부부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가끔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기회로 삼자. 아, 이 얼마나 긍정적인 마인드냐.

스스로 감탄하고 있는데 시동이 안 걸린다. 배터리가 방전됐다. 밀어서 걸어볼까? 점프해서 걸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타이어 공기압도 미심쩍다. 푹 짓눌려 있는 것이 척 보기에도 동해까지는 무리다. 아아아. 애꿎은 담배만 석 대 연속으로 피우고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비장하게 나가더니 5분 만에 돌아가면 아내는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볼 것인가. ‘너는 다 이루고 사는구나’ 하며 부러워하던 친구들은 이런 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훌쩍’ 떠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출퇴근 익스프레스

몇 년 전 BMW i3가 나오자마자 구입했다. 안세병원 사거리에서 항상 만나는 S63 AMG는 작은 차가 그렇게 빠른 게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매일 아침 배틀을 걸어왔다. 전기모터는 휘발유 엔진과 달리 밟자마자 최대토크를 발휘하기 때문에 발진 가속은 아무리 배기량이 커도 상대가 안 된다. M3보다도 빠른데 덩치 큰 S클래스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다. 물론 속도가 붙으면 엔진이 유리하므로 앞서 나가는 건 다음 신호등까지지만, 어차피 막히는 출근 시간이니 밑천이 드러나기 전에 레이스가 끝난다. 게다가 전기세는 한 달 내내 사용해도 5만원이 안 되니, 휘발유 차와 비교하면 거의 공짜로 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게 출퇴근할 때는 최고인데, 주말만 되면 좀 애매해졌다. 회사에 충전기가 있고,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충전 가능한 곳이 없어 금요일 밤 가득 충전한 상태로 귀가해서 토요일에 외식 한 번 하고 나면 일요일은 조금 초조해졌다. 완전 충전 시 주행 거리는 약 120km. 강남에서 왔다 갔다 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홍대 앞 조폭 떡볶이가 먹고 싶다거나 하면 거리 계산을 제대로 해야 한다. 잘못하면 강변북로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지게차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전기차’라는, 전 세계를 뒤흔드는 새로운 명제에 대해 아직 명확히 찬성표를 던질 수 없는 이유는 딱 하나다. ‘훌쩍’ 떠나는 ‘밤바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인천공항 함 쏘자고 전화가 와도 전기차라면 머릿속으로 덧셈을 해야 한다. 남은 주행 가능 거리가 몇 킬로미터고 인천공항까지 몇 킬로미터니까 다녀오면 남은 킬로미터는….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머리 식히려고 드라이브 떠나는 게 아니라 산수 공부하려고 떠나는 거 같다.

인터콘티넨탈 테슬라 충전소

전기차로 동해를?

미국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의 안전성 테스트 사상 최고 등급을 받았네, 제로백이 페라리보다 빠르네… 테슬라를 수식하는 화젯거리가 다양하지만, 테슬라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최대 500km에 달하는 주행 거리다. 배터리 용량이 커서 휘발유 차만큼 주행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주행 거리가 150~200km 정도 되는 전기차는 출퇴근 용도로 사용하는 게 고작이지만, 500km라면 ‘마실’ 용도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테슬라가 마련한 전용 충전기가 부산은 물론이고 남해까지 가능하므로 동선만 확실히 짜면 전국 어디에나 갈 수 있다.
그런데 부산? 남해? 내 차로 그곳에 몇 번 가봤나 생각해보니 한 번도 안 가봤다. 보통 그런 데는 고속열차 타고 가잖아. 굳이 거기까지 가면 뭔가 ‘전기차로 국토 종단!’ 뭐 이런 낚시야 가능하겠지만, 실제로 타고 다닐 때는 그런 감정은 못 느끼지 않을까.
그래서 평소 내가 ‘훌쩍’ 떠나는 곳으로 가봤다. 동해. 훌쩍 떠나고 싶었던 동해. 서핑도 하고, 해돋이도 보고, 황태구이도 먹고.
먼저 삼성동의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의 지하 4층 주차장으로 간다. 그곳에는 1시간 만에 테슬라 모델S를 완충할 수 있는 슈퍼 차저(Super Charger)가 있다. 배터리를 가득 채우면 550km 정도를 달릴 수 있다고 표기되어 있는데, 고속 주행을 하면 그에 조금 미치지 못한다. 전기차는 시내에서 연비가 더 좋기 때문인데, 어찌 됐든 우리나라 환경부가 계산해서 공인한 378km보다는 어떻게 달려도 훨씬 더 나온다.
그리고 동해로 쏜다. 사실 ‘시승기’ 하면 달리는 기분을 묘사하는 게 아주 중요한데, 이 차는 엔진 대신 모터로 달린다는 것 외에도 많은 게 다르다. 엔진과 미션이 승차감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이 차를 타보면 알 수 있다. 빠르고 편안하다고 쓰면 너무 성의 없다고 하겠지만 그 이상 쓸 말이 별로 없다. 직접 타보지 않은 사람에게 이 차의 주행 질감을 설명하는 건 쉽지 않다. 지금까지 엔진 자동차가 ‘고기’였다면, 전기차는 ‘불에 익힌 고기’다.

테슬라가 달리는 중

고속도로 배틀 without 쏘울

테슬라를 타고 달리면, 상당히 많은 차들이 꽁무니에 붙는다. 다른 차와 경쟁할 마음이 없다면, 뒤에 ‘친환경 차예요’ 같은 스티커를 붙이는 게 좋다. 동호회 스티커 붙인 디젤 세단 같은 건 너무 싱겁기 때문에 그냥 신경 끄는 게 낫다. 2도어 스포츠카 중에서도 3리터 엔진 이상 되면 붙어볼 만한데, 그마저도 배틀이 길게 이어지진 않는다. 밟으면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진다. 스윽 사라지는 게 아니라 ‘뿅’ 하고 맹렬하게 서로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배틀’이라기보다는 ‘이탈’이라고 부르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최고속도는 시속 235km에 제한이 걸려 있어 독일 아우토반을 초고속으로 질주하는 차량이라기보다는 중속대의 가속을 즐기는 장면이 제일 어울린다.

달리는 테슬라의 내부

그런데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스로틀이 열리고, 엔진이 회전수를 높이고, 가솔린이 폭발하고, 배기가스가 분출하면서 크랭크를 돌리고, 드라이브 샤프트로 힘을 전달해 바퀴를 굴리는 일련의 과정이 생략되어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퓽 하고 튀어나가는데, 그게 또 아무 소리 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영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디에 어떤 부분에 감동해야 할지 잘 알 수 없는 것이다. ‘우와 이 가속 봐라’ 하고 만족하기에는 운전 재미가 너무 단조롭다고 해야 하나. 물론 며칠씩 타더라도 익숙해질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가속이기는 하지만, 스티어링휠과 액셀러레이터 조작과 하중 이동으로 고민해가며 달리는 자동차 타입은 아니다.
이렇게 쓰면 ‘빠르지만 재미없다’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그와는 또 조금 다르다. 이 정도 속도로 달리면서도 실내 소음이 전혀 없고, 심지어 뒷자리는 편안하기까지 하니 지금까지 타본 차를 기준으로 테슬라를 평가하려면 머릿속이 복잡해질 뿐이다. 애초에 빠른 게 재미없을 수도 없는 일이고.

동해를 바라보며 혼밥 @씨마크 호텔

배터리가 얼마 남지않은 대시보드 화면

목적지로 삼은 강릉의 씨마크 호텔까지 거리는 약 230km. 테슬라 계기반에 표시된 주행 거리에 따르면 왕복도 가능하지만, 고속도로에서 미친 듯이 전력을 낭비해서 도착했을 때 남은 주행 가능 거리는 150km에 불과했다. 그러나 씨마크 호텔에는 8시간 만에 완충이 가능한 데스티네이션 차저가 있어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휴식하는 동안 충전할 수 있다. 슈퍼 차저와 달리 시간이 좀 걸리지만, 전국 곳곳에 준비되어 있어 테슬라의 주행 가능 거리를 늘여준다. 이미 준비된 거점만 해도 45군데나 되기 때문에 도심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평소 동선의 어딘가에서는 충전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말마다 들르는 백화점이나 쇼핑몰에서 충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전기차도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씨마크호텔앞의 테슬라
동해바다를 배경으로 한 테슬라

2년 전 새로 오픈한 씨마크 호텔은 과거 현대호텔이 리뉴얼한 곳. 동해 최초의 6성급 호텔로 떠들썩하게 오픈했는데, 가보면 알겠지만 허풍이 아니다. 건물이며 시설이며 모두 훌륭해서 여행의 목적지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다. 동해를 사랑하면서도 허름한 여관이나 오래된 호텔, 남사스러운 연인 취향 펜션밖에 선택지가 없어 꺼렸던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사우나와 스파도 갖추었으니 숙박 여행이 아니더라도 잠깐 들러 휴식할 목적으로 이용하기에도 좋다. 나는 드라이브 여행 끝에 사우나에 들러 마사지를 받곤 하는데, 거리 면에서나 시설 면에서나 이곳은 최고의 장소다. 그러고 보니 고속도로가 아니라 대관령 구길을 이용하면 아무도 없는 와인딩 로드를 신나게 달린 후 뜨거운 욕탕에 몸을 담그고 휴식을 취하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했던 여행도 즐길 수 있다.

씨마크 호텔의 1층 레스토랑은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는 곳이다. 실내가 넓고 시야가 탁 트여 꽤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는 드라이브 여행을 가면 그 지역의 허름한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운치 있다고 여기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운치’를 느낄 만한 식당이 별로 없다. 소문이 좀 나면 TV에 소개되면서 줄을 서고 플래카드가 걸려 예전의 분위기가 바뀌어버리니, 차라리 조용하고 깔끔한 호텔 레스토랑이 나을지도 모른다.

드라이브하러 가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혼밥…이라고 하면 너무 샌님 취향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지프 타고 가서 비박하는 것만 남자의 여행은 아니지 않은가. 때로는 일상에서 크게 떨어지지 않은 여행이 더 휴식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샌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여행에서 가장 뿌듯한 점이라면 기름 값이 무료라는 거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지하의 슈퍼 차저도, 씨마크 호텔의 데스티네이션 차저도 모두 무료이므로 왕복 500km에 드는 기름 값을 생각하면 갈비구이 정식을 먹어도 죄책감이 안 든다.

씨마크호텔의 테슬라 충전소

Conclusion

‘자동차’란 얼리어답터를 위한 물건이 아니다. 하물며 1억원이 넘는 대형차라면, ‘궁금해서’ 구입해보는 물건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놀라운 스피드나 비할 데 없는 승차감은 ‘특징’이 될 수는 있어도 장점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놀라운 스피드와 예술품 같은 디자인을 지닌 페라리도 메르세데스-벤츠와 함께 차고에 들어갈 수 있기에 가치 있는 것이지 ‘딱 한 대만’ 골라야 한다면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테슬라가 자랑하는 자율주행이나 순간가속도 등도 ‘일상의 발’로 완벽하게 이용할 수 있을 때 가치 있는 것이지, 실제로 활용하는 데 제약이 있다면 아무리 기능이 훌륭해도 ‘신기해서 한 번 타본 차’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미래를 위한 대안,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서울에서 동해까지 한 번에 이동할 수 있고, 천안에서 한 번 쉬어가면 부산까지도 OK. 전국 어디를 가려고 하든 충전망이 잘 짜여져 있다. 물론 2분이면 연료탱크를 가득 채울 수 있는 내연기관 자동차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테슬라가 차량 인도보다 먼저 충전망을 설치한 건 아주 현명한 처사였다고 생각한다. 내 라이프스타일에서 가장 장거리 여행에 해당하는 ‘동해 보러 훌쩍’에 성공하고 나니, 다음 차로 테슬라 한 번 타볼까? 하는 생각에 무게가 실린다. 어쩌면 몇 년 후에는 일론 머스크와 함께 화성행 로켓에 몸을 실을지도 모르겠다.

> 글 신동헌. 남성지 LEON의 전편집장이자 칼럼니스트, 방송인. 자동차 전문 블로거 ‘까남’으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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